김지미 "여배우들, 자긍심 갖고 일류 연기자 됐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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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팬들과 만난 원로배우 김지미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오픈토크 '영화인 김지미' 행사가 열린 4일 오후 부산 남포동 비프광장 야외무대에서 배우 김지미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
무대 앞 광장에는 나이 지긋한 중장년층 관객 200여명이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앉아 김지미를 뜨겁게 맞았다.
은발의 짧은 커트에 회색 바지 정장 차림으로 등장한 김지미는 "부산 시민들의 조금은 '극성스러운' 열정 덕분에 부산영화제가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면서 "저 역시 17살에 배우가 돼 현재까지 여러분이 주신 사랑을 듬뿍 받았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김지미는 여고 3학년이던 1957년 김기영 감독 눈에 띄어 영화계 데뷔했다. 당시 이목구비가 돋보이는 서구적 외모와 다른 배우들과 차별화한 연기 스타일로 주목받았다. '춘희'(1967·정진우), '토지'(1974·김수용), '을화'(1979·변장호) 등에 출연하며 1960∼70년대 최고 스타로 자리했으며 60여년간 700여편에 이름을 올렸다.
1980년대 중반에는 영화제작사 지미필름을 차려 '티켓'(임권택·1985), '명자 아끼꼬 쏘냐'(이장호·1992) 등 7편을 제작했다.'
김지미는 "17살 먹은 소녀가 세상 물정 모르고 영화계 픽업돼 영화 일을 하다 보니 영화가 사회에 주는 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불우한 세대에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영화법이 바뀌었다"며 "그럴 때 이런저런 규제가 너무 심해서 편협한 영화로 흘러가게 됐다. 그러면서 우리 같은 사람은 연기할 수 있는 영화가 없어졌다"고 떠올렸다.
김지미는 "당시에는 유흥가 여성들을 모델로 해서 찍는 영화들만 통하고, 사회 고발성 영화는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다"면서 "그러다 보니 사실상 배우로서 직장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였다"며 영화 제작에 뛰어든 계기를 설명했다.
김지미는 1990년대에는 두 차례에 걸쳐 영화인협회 이사장을 지내면서 스크린쿼터 및 UIP 직배 등과 관련해 영화계 수장으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는 후배 여성 영화인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하자 "저는 여성, 남성을 구별하지 않고 생각한다"며 "요즘에는 풍요롭고 좋은 환경에서 영화가 만들어진다. 한국영화가 이만큼 발전하기까지 영화인들의 큰 노력과 후원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여배우들은 열심히 노력해서 일류가 돼야 한다"면서 "그렇게 되면 좋은 배우로서 칭호를 받게 되고, 남자와 여자 구별이 안 생긴다. 좋은 연기자가 되려면 자존심과 자긍심을 갖고 정말로 연기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일성 "영화 촬영 60년…제 원천은 불행한 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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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에 답하는 정일성 촬영감독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회고전의 주인공 정일성 촬영감독이 4일 오전 부산 해운대구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 문화홀에서 열린 인터뷰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
1929년생인 그는 20대 후반에 조긍하 감독의 '가거라 슬픔이여'(1957)로 영화 촬영에 입문했다. 이후 총 38명의 감독과 138편을 찍었다. 김기영 감독의 '화녀'(1971)에서는 파격적인 앵글과 색채 미학을 선보였다.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1980)에서는 사계절을 담기 위해 1년 이상 촬영하는 열의를 보인 것으로 유명하다.
임권택 감독과는 30여년간 함께 작업한 동지다. 두 사람은 '신궁'(1979)으로 처음 만난 뒤 '만다라'(1981), '서편제'(1993), '취화선'(2002), '천년학'(2007)에 이르기까지 명콤비로 활약했다.
정 감독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한국전쟁, 독재정권, 민주화 운동 시기를 되짚으며 영화 인생을 되돌아본 뒤 "긴장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에 영화인으로서 영화를 통해 어떻게 사회에 기여할 것인가 하는 정신무장 같은 게 됐다"고 떠올렸다.
아울러 오랫동안 일한 원초적인 힘으로 "분단 상황"을 꼽은 뒤 "분단에서 비롯된 아픔과 이념 갈등, 가족 해체 등을 통해 영화가 상호발전해오는 과정에서 저도 그 일원으로 성장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함께 한 감독들과 아내에게도 공을 돌렸다. "저를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한 힘의 원천 중 3분의 1은 함께 작업한 감독들이고, 3분의 1은 1년 중 6개월 이상 떠돌이 생활을 한 남편을 대신해 홀로 집을 지켜준 아내 덕분입니다. 나머지 3분의 1 정도가 제 능력이죠."
그는 대표작을 뽑아달라는 말에 선뜻 몇편을 꼽지 못했다. 대신 성찰이 담긴 답이 돌아왔다. "그동안 183편 정도 찍었는데, 그중 40~50편은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운 영화들입니다. 젊고 철없을 때는 흥행작이나 수상작을 대표작으로 뽑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부끄럽게 생각했던 그 40~50편의 영화가 교과서처럼 저를 지배합니다. 열심히 찍어서 모든 사람이 인정한 작품보다는 실패한 영화가 저에겐 좋은 교과서가 된 것 같습니다."
정 감독은 그러면서 "과거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4·19와 5·16 이후로, 당시 영화계는 침체기였다"면서 "제가 찍었든, 안 찍었든 그 시기에 신상옥 감독의 몇몇 영화나 이만희 감독 '만추'(1966), 김수용 감독 '산불'(1967), 김기영 감독 '하녀'(1960) 같은 명작이 나왔다는 게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는 요즘 한국영화가 "미국 영화만큼 재밌다"면서도 쓴소리도 빼놓지 않았다.
"요즘 흥행한 한국 영화들을 보면 저는 그렇게 촬영을 못 할 것 같습니다. 제 작품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는데, 저는 한 번도 아름답게 찍으려고 노력해 본 적이 없어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아픔을 어떻게 극대화해서 사람들에게 역사의 이어짐을 보여줄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혔죠. (최근 흥행작들처럼) 미국 영화의 아류처럼 찍고 싶지는 않습니다."
정 감독은 후배 감독들에 대한 애정도 표시했다. 그는 한국영화 100년이 되는 해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데 대해 "개인적으로 축하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눈여겨보고 있는 후배 감독을 꼽아달라는 말에는 "이름을 거명하면, 거론되지 않은 감독들에게 왕따당할까 봐 못하겠다"고 웃었다.
대신에 후배들을 위해 애정이 어린 조언을 건넸다. 그는 "요즘 젊은 감독들은 필름으로 촬영한 사람을 골동품 취급한다"며 "필름을 완벽하게 이수하지 않으면 디지털로도 좋은 영화를 촬영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아울러 "한국영화 미래는 밝다"면서도 "기업들이 독립영화 작가들에게도 투자해 대형 영화에 대적할 만한 토대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정 감독은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을 묻자 "사람이 죽을 때까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죽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면서도 한가지 소망을 밝혔다.
"과거 했던 영화를 다시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영화라는 게 내 마음대로, 나 혼자 정리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나를 모르는 젊은 감독이 어느 날 느닷없이 '같이 영화를 하자'고 제안해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길이 없는 들판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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