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타임스 = 권수빈 기자]
정월대보름의 둥근 달이 떠오르면 마을마다 장승 앞에서 북소리가 울린다. 사람들은 흙 묻은 손을 맞잡고 “올해도 풍년이 들길”을 외친다. 오랜 세월 지역의 공동체 정신을 이어온 무형유산이 올해도 경남 밀양에서 다시 깨어난다.
밀양시는 2월 12일 정월대보름을 맞아 ‘법흥상원놀이’와 ‘감내게줄당기기’ 등 경남도 무형유산 공개행사를 연다. 행사는 단장면 법흥상원놀이전수관 일대와 삼문동 야외공연장에서 열리며, 전통 의례와 민속놀이, 달맞이 행사, 달집태우기 등이 어우러진다. 그 자체로 지역의 유산을 재현하고, 시민이 함께 즐기는 살아있는 전통의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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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밀양시 |
‘무형유산’은 형태 없는 문화적 유산을 뜻한다. 조상 대대로 전해진 예능, 전통 기술, 의식, 의례, 구전 전통 등이 이에 속한다. 현재 한국에는 140여 종의 국가무형문화재가 있으며,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항목이 많다. 대표적으로 종묘제례악, 판소리, 강강술래, 김장문화, 농악, 제주해녀문화, 씨름 등이 있다. 한국인의 삶의 리듬과 공동체 의식을 상징하는 것들이다.
경남은 전통이 깊은 지역답게 다채로운 무형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통영오광대, 밀양백중놀이, 하동포구두레놀이, 의령큰줄다리기 그리고 이번 행사에서 공개되는 법흥상원놀이와 감내게줄당기기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유산은 모두 마을의 결속과 풍요를 기원하는 민속놀이로서 공동체 신앙의 현대적 재현이라 할 수 있다.
밀양 단장면 법흥리에서 전승되는 법흥상원놀이는 경남도 무형유산 제20호로, 지신(地神)을 달래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정월대보름 의례다. 놀이의 시작은 지신밟기다. 풍물패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올해도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을 건넨다. 이어서
달맞이, 쥐불놀이, 풍년굿이 어우러지며 마을 전체가 하나의 ‘무형유산 무대’로 변한다. 신라시대부터 내려온 마을 제의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으며 농경 사회의 공동체 정신과 전통 신앙이 살아 있는 유산으로 평가된다.
‘감내게줄당기기’는 밀양 삼문동 일대에서 이어지는 정월대보름 줄다리기 행사로, 경남도 무형유산 제23호로 지정돼 있다. 게줄(큰 새끼줄)을 마을 사람들이 함께 꼬고, 양편으로 나뉘어 당기는 줄다리기 형식의 놀이지만 그 속에는 ‘풍년과 화합’을 기원하는 집단 의례의 의미가 담겨 있다. 올해 행사에서는 줄당기기뿐 아니라 달집태우기와 쥐불놀이가 함께 열린다. 이날 타오르는 달집의 불길은 나쁜 기운을 태우고 새해의 복과 풍요를 불러들이는 정월대보름의 상징적 장면으로 자리한다.
올해 밀양의 무형유산 공개행사는 ‘공동체 기억의 복원’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산업화 이후 사라져가던 마을 공동체의 정서, 함께 노동하고 함께 기원하던 사람들의 리듬이
이날만큼은 다시 살아난다. 밀양시 문화예술과 정영선 과장은 “무형유산은 우리 지역 정체성과 결속을 강화하는 중요한 자산”이라며 “유산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 맥을 이어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밀양아리랑우주천문대에서는 같은 날 ‘달과 우주, 그리고 정월대보름’을 주제로 한 천문 체험 프로그램도 열려 전통과 과학이 만나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융합 축제’로 확장됐다.
무형유산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몸과 노래, 손끝에서 이어지는 살아 있는 역사다. 법흥상원놀이의 풍물소리, 감내게줄의 팽팽한 긴장감, 달집이 타오르는 불빛은 결국 ‘함께 사는 삶’이라는 오래된 진리를 다시 일깨운다.
뉴스타임스 / 권수빈 기자 ppbn0101@newstimes.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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